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일본 대중문화 개방 (문단 편집) == 인식의 변화 == 사실 1990년대 이전까지는 인터넷이 대중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일본 문화뿐만 아니라 일본에 관한 소식 자체를 객관적으로 접할 수 있는 매체가 별로 없는 시기이다 보니 수입이 허가된 일부 아동급 애니메이션 등을 제외하곤[* 이런 작품들조차도 방송법과 방송위원회 심의규정에 따라 [[왜색]]을 지우기 위해 내용을 [[현지화|한국식으로 대거 수정/삭제해서]] 방영하는 경우가 많았다.] [[케이블 방송]]도 없던 시절 한국 [[지상파]] TV 방송을 타는 것이 제한된[* 물론 그러는 와중에도 알게 모르게 일본 방송 포맷이 들어오는 경우는 있었다.] 많은 일본 문화들은 성인급으로 가면 알만한 정보가 많이 차단되어 있었다. 물론 이때도 한국내에 음성적으로 들어온 일본 문화로 인해 개방 이전이지만 특히 일본과 가까운 부산이나 대도시인 서울 등 일부 지역에서는 매니아층이 형성되어 있었고, 일본 현지에 비해 시기는 늦지만 유행하는 패션이나 음식 같은 것이 알려지기도 했었다. 문화와 무관하게 일본 제품은 품질을 인증받아 좋은 제품으로 취급되기도 했고. 다만 당시 정서상 일본 문화에 심취한 마니아는 퇴폐 문화를 즐기는 [[날라리]]나 [[오타쿠]] 비슷한 취급을 받기도 했고, 불법물 관련해서 경찰서를 다녀오는 일도 있는 등 개인이 뭔가 주체적으로 접할 기회는 거의 없다 보니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일본 문화가 굉장히 왜곡되어 접해지는 측면이 있었다. 여러모로 사회적 시선이 고울리 없었다. >그렇다. 일본문화개방을 우리는 법적으로 승인한 일이 없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일본문화가 경계둑 너머 갇혀 있기라도 한 것인가. 다 아는 사실이 아닌가. 이미 그 둑은 무너졌고 그 검은 안경을 눌러쓴 일본문화가 어두운 통로를 거쳐 서울의 샹들리에 불빛에 버젓이 번쩍이고 있는 것을. [[청담동]]의 어느 카페를 가보라, 그곳은 결코 서울의 카페가 아니다. 일본 그림 아래 일본식 쇼트컷을 한 일본 패션의 여자와 남자가 일본 노래에 푹 젖어 차를 마시고 있다. 물론 10대들이 태반이다. 청담동 뿐만이 아니다. [[명동]]에는 금지된 가요 음반과 금지된 잡지가 줄을 이어 널려 있다. 10대보다 더 어린이들의 놀이대상인 만화 비디오도 거의 일본 것이 압도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찾아서 보는 게 아니다. 그저 길을 걷노라면 쉽게 눈에 띄는 것들이다. >- [[경향신문]] 1994년 3월 5일자 정동칼럼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4030500329105005&editNo=15&printCount=1&publishDate=1994-03-05&officeId=00032&pageNo=5&printNo=15019&publishType=00010|<이미 둑을 넘어온 일본문화(신달자 글)>]] 그렇지만 위의 칼럼에서 보듯이 이렇게 정치권이나 겉으로 드러나는 대중의 부정적인 인식과 다르게 1990년대 접어들어선 사회 개방 분위기나 서서히 늘어나던 PC 보급과 함께 일본 문화가 암암리에 퍼져나갔고, 특히 대도시 지역 청년층들 사이에서는 이미 일본 문화가 알게 모르게 소비되는 중이었다. 참고로 일본 문화의 보편화가 거의 진행되지 않았던 1960~70년대엔 일본의 대중문화인 일본 만화, 영화는 주로 일본 문물에 관심이 많고 일본어가 가능한 지식인 계층이나 일본 출판물을 입수할 수 있던 중상류층들이나 소비할 수 있었던 것들이었다.[* 당시 대통령이던 [[박정희]]만 하더라도 사석에서는 [[김재규]]와 함께 일본 [[사무라이]] 영화 등을 즐겨보곤 했다고 한다. 또 사석 술자리에선 일본어로 농담하고 [[엔카]]를 불렀다는 증언도 있다. 어찌보면 당연한 것이 박정희는 일제 시절 [[만주군]] 장교 출신이다.] 그러나 1970년대 후반 쯤 되자 상황이 점차 바뀌게 된다. 1970~80년대 당시 독재정권 하에서 [[해외여행]]이 제한되어 있던 한국이라 할지라도, 무역업을 하거나 여러 이유로 해외에 나가는 사람들은 곧잘 일본 물건들을 사서 들여오고 있었고,[* 이래서 이 당시에 "입으로는 반일을 외치면서 외국 나가기만 하면 코끼리 전자밥솥([[조지루시]]) 사서 들어오는 [[높으신 분들]]"에 대한 비판이 많았다. 더욱이 무역업을 하는 부모를 둔 아이들은 일본으로 출장갔던 아버지가 선물로 사온 일본제 초합금 로봇 장난감([[그레이트 마징가]]나 [[그랜다이저]])을 갖고 노는 등 또래 아이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보따리 장수나 비공식적인 루트를 통해 어느정도는 해외 상품이 들어왔다. 남대문 중국 대사관 앞에는 해외서적 서점이 꽤 있었는데, 이곳에서는 비록 몇 달 지난 것이어도 일본의 [[논노]]를 비롯한 다양한 패션 잡지를 사서 볼 수 있었고, 'Burrn!' 매거진을 구할 수 있었기 때문에 당시 락덕후들도 이러한 상점들을 드나들었다.[* 비슷한 이유로 [[앙드레 김]]도 젊은시절 수입 서점을 드나들며 [[보그(패션지)|보그]]지를 구했다고 한다. 당시 한국 락덕후들 사이에서 일본 락은 의외로 인지도가 높았다. [[김태원(음악인)|김태원]]의 밴드 [[부활(밴드)|부활]]은 앨범 속지에 '''[[라우드니스]]를 [[야 이 반란군 놈의 새끼야|지옥으로 보내자]]'''라고 써놓기까지 했다(...).] 물론 당시 상황이 상황인 만큼 몇달 지난 잡지가 들어오는 등[* 해외에서 우편으로 보내는 경우 당시에는 1, 2개월이 걸리는 것은 예사였다. 배로 실어 왔으니 당연한 일이다.] 상태는 매우 좋지 않았만 그래도 사서 볼 사람들은 다 사서 봤다. 더군다나 잡지사, 출판사 등에서 돈벌이용으로 일본 서적들을 무단으로 베껴서(...) 출판하는 경우도 제법 많았기 때문에 사실상 일본 문화가 어느정도 펴져있던 상황이기도 했다. 결국, 일본 문화 개방 이전에도 보고 즐길 만한 수준이 되는 사람들은 간접적으로라도 일본 문화를 접하고 있었다.[* 이러한 현상은 한국만의 현상은 아니었다. [[소련]]이나 [[동독]] 문서를 보면 알 수 있지만, [[북한|윗동네]]처럼 아예 폐쇄된 국가가 아닌 이상에야(심지어 여기도 한국 문화들이 알게 모르게 유행하고 있다.) 어쨌든 해외의 물건들이 어느 정도는 들어오기 마련이다. 일례로 소련의 경우 [[늑골]] 문서에 나와 있듯 X레이 필름으로 제작한 조악한 빽판이 암암리에 유통되었고, 서구 국가(핀란드)와 가장 가까운 레닌그라드 등지를 통해 기타나 신디사이저 등이 밀수되기도 했다. 이 기기들과 빽판들은 훗날 [[내래 인민의 락을 보여주갔어]] 문서에 나와 있는 수많은 러시아 락밴드들의 모태가 되었다. 이후 페레스트로이카를 기회로 [[빌리 조엘]] 등 서구 음악가들이 소련에서 공연을 할 때면 기라성 같은 인파가 모여 떼창을 시전했으며, 1991년 미국의 록밴드 [[메탈리카]]의 [[모스크바]] 공연에는 러시아에서 정식으로 음반이 발매된 적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80만명이 운집하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그야말로 거의 모든 사람들이 서구의 영화, 음악, 패션을 즐겼다. 문화적 측면에서만 따지자면 냉전은 일찌감찌 미국의 승리로 끝난 지 오래였다.~~] 게다가 부산은 [[쓰시마 섬]]에서 넘어오는 일본 TV와 라디오[* 중파(AM)방송 한정. FM방송은 당시 주파수 대역이 76~90㎒였기 때문에 이 대역을 청취하려면 5~6(76~88㎒)번 음성부를 들을 수 있는 라디오가 필요했다. TV는 VHF-Low대역만 아니면 전부 수신할 수 있었지만 CATV대역을 지원하면 전부 다 수신할 수 있다.] 전파가 잡히는 지역이었기 때문에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일본 음악을 접할 수 있었다. [[블루 라이트 요코하마]]가 유행하기 시작한 지역도 부산/경남이었다.[* 심지어 이 노래는 1969년 노래다. 해당항목 참조.] 1980년대쯤 되면 한국이 소비사회로 진입하면서 일본 노래가 다운타운[* 당시 지상파나 출판 매체가 아닌, 도시 중심가의 디제이 다방을 중심으로 형성된 신(scene)을 의미. 요즘으로 말하면 [[인디]] 또는 [[언더그라운드]]라고 할 수 있다.[[http://news.joins.com/article/10056651|#]]]에선 대놓고 유행하기 시작한다. 때문에 이 시기를 1차 일본문화 붐으로 보기도 한다. 나이트 클럽에서는 [[콘도 마사히코]]나 [[C-C-B]], [[P-MODEL]], [[안전지대]], [[마츠다 세이코]], [[wink]], [[X JAPAN]], [[나가부치 츠요시]] 등의 노래가 알게 모르게 울려퍼지기도 했고, 명동과 이태원의 음악 다방에는 자칭 일본음악 애호가들을 드물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 심지어 웹툰작가 [[seri]]처럼 [[카드캡터 사쿠라]] 등 [[NHK]] 류 애니를 접하면서 입덕한 경우도 있다. 다만 부산 시민들 사이에선 1980년 7월에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0070400329207013&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0-07-04&officeId=00032&pageNo=7&printNo=10696&publishType=00020|'일본 TV 안 보기 운동']] 같은 걸 벌이기도 했고 1984~1986년경에는 정부가 일본방송 침투에 대해 [[http://theme.archives.go.kr/next/pages/new_newsletter/2017/html/vol_73/sub03_2.html|대책안을 세우려고 했으나,]][* 해당 사실은 2017년 국가기록원이 공개했다.] 실효가 거의 없었다. 그리고 일본 문화가 싫다고 해도 가전제품은 일제가 좋다는 사실은 모두가 동의했다. 사실 그 시대에 좀 산다는 사람들치고 [[소니]]나 [[파나소닉|내쇼날]], [[워크맨(음향기기)|워크맨]], [[조지루시]] [[전기밥솥]]에 껌뻑하지 않은 사람은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심지어 워크맨은 당시 오늘날의 '인싸'들이라면 [[인싸템|갖춰야 할 필수품]]일 정도로 그 위치가 높았다.]. 이러한 분위기를 중심으로 [[세운상가]], [[용산 전자상가]] 등지에서 일본 상품이 유통되면서 덩달아 일본 문화 컨텐츠도 돌아다니기 시작했고, 또한 한국의 [[빽판]] 전통에 힘입어, 1980년대에는 복제판 레코드와 테이프가 유통되었고 1990년대에는 [[서민CD|복제판 CD]]나 비디오 등이 유통되었다. 만화책도 이미 1951년 서봉재 화백이 그린 [[http://web.archive.org/web/20190807111224/http://dml.komacon.kr/webzine/column/1172|<밀림의 왕자(소년 케니야)>]]를 시작으로 해적판이 들어와서 성행했다. [[일본 애니메이션]]이나 만화에 대해 논의해 보자면, 이러한 일본 대중문화들을 진지하게 파고드는 [[오타쿠]] 문화는 주로 고소득층 소비자들의 문화였다. 이는 1990년대 초중반 [[PC통신]]에서 오타쿠는 고급 문화라는 식의 이야기들이 나오는 배경이 되었다. 좀 더 거슬러 올라가면 1980년대 중반 [[세운상가]]와 [[청계천]]을 유령처럼 떠돌던 1세대 오타쿠들의 이야기 또한 전설처럼 전해지고 있다.[* 실제로 한국 오타쿠의 역사는 대략 1980년대 초중반부터 시작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자세한 내용은 [[형레코드]] 문서 참고.] 그리고 한국 내에서도 외국 애니를 접할 기회가 생각보다 많았는데, 자체적으로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는 것[* 애니메이션 산업이 인력집약적인 특성이 강하다 보니 다른 프로그램에 비해 제작비용이 많이 들어갔고 애니메이션 방영시간대의 광고료도 비싸지 않아서(= 수지타산이 안 맞아서) 방송사 입장에선 애니메이션 제작에 대해 별다른 매력을 느끼기는 힘들었다.]보다 일본, 미국에서 애니 수입하는 것이 훨씬 싸게 먹힌다는 이유 때문에 수입된 일본 애니메이션들이 지상파에서 방영되었기 때문이다. 정확하게는 합작 애니메이션인 [[황금박쥐(애니메이션)|황금박쥐]]가 [[동양방송|TBC]]를 통해 방영되기 시작되면서 인기를 얻게 되자 TBC에서 본격적으로 일본 애니메이션을 수입 방영하기 시작했고, [[KBS]]와 [[MBC]]에서도 이를 따라해 일본 애니메이션을 방영하기 시작했다. 물론 이 당시의 일본 애니메이션들은 [[뾰로롱 꼬마마녀]] 같은 예외적인 케이스를 제외하면 당대의 방송심의에 따라서 방송사들이 [[왜색]] 분위기, 또는 일본어 서체가 있거나 일본적인 성격이 짙은 부분은 모두 삭제 및 영상편집기술이 빈약했던 당시에는 모자이크나 블러 처리로 대충 수정하는 방법으로 배제, 지명 같은건 도쿄→서울, 요코하마→인천, 오사카→부산, 교토→경주, 고베→울산 등으로 한국적 분위기로 수정하고 캐릭터 이름 역시 모두 한국식으로 수정하고, 이름도 일본식 이름보다는 한국식 이름으로 고치면서 일본 애니라고 인식하는 이들은 별로 없었지만 TV에 방영된 덕에 일본 문화가 어느 정도 친숙해지는 데 기여하긴 했다.[* 만화의 경우 1990년대에 대박을 친 최고의 베스트셀러 [[슬램덩크(만화)|슬램덩크]]가 한국 청년층을 강타한 바가 있다. 물론 슬램덩크는 일본만화인 것을 대부분 알고 봤다. ~~많은 어린이들은 걍 이름이 강백호니 당연히 한국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한 것은 함정~~] 물론, 이에 대하여 자국 산업 육성 등한시 같은 문제 제기도 많았지만, 방송사 내부에서 애니메이션 제작에 대한 인식 자체가 미비했던데다가 애니메이션 제작 자체가 상당히 돈이 드는 일이라 방송심의가 엄격했던 시절이었음에도 일본 애니메이션은 계속해서 방영되었고, 오히려 국산 TV 애니메이션 제작, 방영이 [[한국 애니메이션/역사|1987년에 와서야 이루어졌다.]][* 그 이전에도 [[한국 애니메이션|국산 애니메이션]] 방영이 안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전부 [[애니메이션 영화|극장판 애니메이션]] 재방이었다.] 그나마 이것도 올림픽 + 시청료 거부 운동의 영향 덕택이었다. 제작 계획 자체는 이미 1970년대부터 있었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미뤄졌다. 애초에 이때는 이런저런 검열하고 수입에도 일정부분 제한을 가하거나 수입금지 딱지를 붙였던 시절임에도 [[애니메이션 쿼터제]] 같이 국산 애니메이션을 체계적으로 지원하는 제도가 의외로 존재하지 않았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라 더 그렇다. 정부 부처 지원으로 영화 애니메이션을 지원해 줬다고는 하지만 그것도 무턱대고 지원해 준 것도 아니었다. 각종 민원에도 TV 애니메이션의 제작이 꽤나 오랜기간 동안 이루어지지 않고 그나마 독재의 끝에 다다라서야 겨우 제작에 나선 것을 생각해 보면 상당기간 동안 당시 정부 부처에서 직무를 유기했다고 봐도 무방한 수준이었다. 당대에 이런저런 검열이나 독점 만화출판사 비호 등으로 국내 만화가들의 창작을 제한시킨 행태를 생각해 보면 의외의 행보였다. ~~당시 시청료를 2500원씩이나 받아먹고 KBS 1TV에서조차 광고를 했던 시절인데 잘 하는 짓이다~~ 거기에 금지에도 불구하고 방송 프로그램의 포맷이나 만화 캐릭터, 작품[* 심지어 1970년대 당시의 초거대 만화출판사 독점집단인 [[합동출판사]]에서 표절을 강요해서 상당수 작가들이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표절작으로 그려내야 했다는 후문도 있다.], [[J-POP]] 등에 대해서 표절이 대단히 많았다. 특히, J-POP 표절 사례는 일본문화 개방 직전인 1990년대에 극에 달했는데 단적인 예로 이 시절 최고의 그룹이던 [[룰라]]는 자신들의 대표곡인 천상유애가 하필 일본가요 표절곡이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대중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겼다.[* 당시 룰라의 리더 이상민은 심적으로 고통을 받아 자살시도까지 했었는데, 이상민이 나중에 해명하길... "자살시도가 아니라, 그 때 화가 나서 주먹으로 유리창을 깨서 피가 많이 났었는데 매니저가 보고 놀라서 병원으로 데려간 것이 와전된 것이다"라고 밝혔다.][* 특히 이 사건이 일본 대중문화 개방를 시행하는데 결정적으로 한몫을 했다는 의견도 있다.] 그 외의 내용은 [[표절/공식 판정]], [[빽판]], [[클로버 문고]], [[다이나믹콩콩코믹스]], [[홍수철]] 등의 문서 참조. 이전까지 유능한 [[싱어송라이터]]였던 [[홍수철]]은 일본가요 하나를 아주 대놓고 표절해서 히트를 치다가 표절 사실이 밝혀지면서 가요계에서 개망신을 당하고 매장 당했다. 만화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라서, 학습 만화의 대표주자 중 한명이었던 [[이원복]]도 초기작에서 치바 테츠야의 작품들을 표절한 바가 있다. 또 [[위성방송]] 항목을 참조하면 알 수 있듯, 성인방송(...) 시청을 목적[* 해외방송 시청이나 표절(...)의 목적도 있었을 것이다.]으로 디렉TV재팬이나 스카이퍼팩트의 수신기([[셋톱박스]])를 밀수입하기도 했다. 결국, 이렇게 무조건적인 차단은 오히려 음성적인 부작용을 키워 나라 망신만 시킬수도 있다는 역설에 따라 개방의 필요성도 요구되기 시작한다. 게임도 1980년대에서 1990년대 전반기에는 [[게임기|콘솔 게임]]이든 [[오락실]] 게임이든간에 일제 위주였고, 1987년에 국산 게임이 나오기 시작한 이후로도 한동안 제대로 성공한 게임이 나와주지 못한 탓에 2010년대까지도 여전히 콘솔 게임은 일본산 게임의 점유율이 높다. 1992년 [[폭스 레인저]]가 성공하고 국산 게임이 본격적으로 양산된 이후로는 국산 게임의 점유율이 올랐지만 오락실이나 콘솔 게임은 여전히 일본에서 제작된 것이 많았으며, 국산 게임이라고 해도 일본 게임의 영향을 적지 않게 받은 작품들이 많았다. 1990년대 중후반이 되어서야 국산 게임의 점유율이 올라가게 되었고, 2000년대 와서는 한국과 일본의 게임 수요 방향이 달라지면서 국산 게임의 점유율이 일본 게임을 월등히 앞서게 되었다. 이렇게 상반된 사회적인 분위기 속에서 일본은 문화개방을 거듭 요구했는데, 사실 한국이 식민지배의 기억을 근거로 일본의 대중문화 유입을 막아온 반면, 일본은 반대로 그 식민지 시대의 기억을 지우기 위해 일본 대중문화 개방에 더 열을 쏟게 된다. 한 예로 일본측은 1972년에 '국제교류기금'을 세우고 1987년에는 '국제일본문화연구센터'를 세워 대외 문화정책을 적극 추진하였다. 1980년대 이래 일본은 '패전국'이 아닌 '경제대국이자 국제화된 일본'이라는 대외 이미지 세탁에 열을 올림으로써 추축국이 아닌 '새로운 일본'을 대외적으로 소개해 과거사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씻으려 했다. 더 나아가 일본의 대중문화 유입이 식민지배를 겪지 않은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수용/확산되고 있다는 점을 이용해 '대중문화의 문화외교적 특성'을 발견해냈다. 그 예로 일본 인기드라마 <[[오싱]]>은 한국을 제외한 아시아 각국에 큰 인기를 끌었는데, 이 작품을 통해 아시아 각국은 근대사의 고난과 가족애 등을 일본과 공유함으로써 근대 일본제국 시절 부정적 이미지를 벗는 데 어느 정도 기여해 내기도 했다. 이와 같은 특성은 1987년 [[대만]]([[중화민국]])의 일본 대중문화 개방에서도 나타났다. 위와 같은 일본 문화의 확산을 배경으로 하여 1988년 5월에 [[영국]]을 방문한 [[다케시타 노보루]] 총리는 런던 연설에서 '세계에 공헌하는 일본'을 실현하기 위한 3개 정책 중 하나로 국제문화교류를 역설했으며, 이듬해 9월에는 5년간에 걸친 <국제문화교류 행동계획>을 발표하는 등 문화외교를 적극적으로 추진하려는 자세를 보였다. 한국에선 1980년대 초반부터 일본문화 개방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기 시작했는데, 1981년 한일의원연맹 제9차 합동회의에서 '문화교류기금 설정'이 합의된 이래 1983년 12월부터 2~3년마다 한일문화교류 실무자회의가 정기적으로 개최되었다. 위와 같은 과정 속에서 일본은 대중문화 개방 문제를 본격적으로 제기했는데, 일본은 한일정상회담 등의 기회를 이용해 틈만 나면 한국에 대해 일본문화 개방을 요구했으나, 식민지 지배에 대한 기억을 지닌 국민감정을 앞세운 한국 정부의 반대로 별다른 진전은 없었다. 1983년 1월 한일경협 차관 협상을 타결하기 위해 일본 총리대신으로서는 한국을 처음으로 국빈 방문한 [[나카소네 야스히로]] 총리는 "문화적 국경을 없앨 것"을 강력히 요구하고, 이는 "국민적 기반에 입각한 양국 간의 문화교류를 점차 확대해 나가기로 하였다"는 식으로 공동성명에 반영되었다. [[1988 서울 올림픽|서울 올림픽]]을 앞둔 1988년 3월, 양국은 외무장관회담에서 민간 중심 기구 '21세기한일위원회' 발족에 합의하고 8월에 제1차 회의가 개최되었으나 결국 문화개방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다음해 5월에는 노태우 대통령의 방일 때 재일 한국인 3세의 법적지위 개선 문제와 한국인 원폭피해자 치료/요양기금 지원 문제, 북-일 관계개선 추진 시 사전협의 등에 합의하면서 일본 대중문화 개방이 언급되었다. 이후 1990년 3월 제4차 한일문화교류 실무자회의에서도 일본은 대중문화 개방을 강력히 요구했다. 그러는 가운데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우루과이 라운드|UR]]과 [[세계무역기구|WTO]], 그리고 정보화와 시장개방으로 대표되는 국경 없는 세계, 이른바 '글로벌 시대'가 도래하였다. 이제 정부도 무조건 문화 쇄국주의로만 나갈 수 없게 된 것. 그런 연유로 일본 대중문화 개방에 대한 사회/학문적 담론이 활발하게 이루어졌으며, 1992년에 [[노태우 정부]]는 일본의 영화와 음악 개방 의사를 밝혔고, 1994년 1월 31일 [[공로명]] 주일대사가 "일본의 대중문화를 음성적으로 들여오는 것보다 양질의 것을 정면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낫다. 이제 일본영화, 음악들의 수입을 적극 검토할 시기가 됐다."라고 얘기를 꺼냈다. 이듬해 2월에 [[이홍구(정치인)|이홍구]] 국무총리 역시 일본 대중문화 개방의 필요성을 시사해 문화개방은 필연적이라고 언급하였다. 그러나 1992년 일본 중의원의 PKO법안 통과로 인한 군사대국화 우려를 비롯해 1995년에는 와타나베/시마무라 망언 사건, [[조선총독부 청사]] 철거, [[김영삼]] 대통령의 한중정상회담 회견 발언("일본놈들의 버르장머리를 고쳐주겠다"), 그리고 [[독도]] 영유권 문제와 [[1998년]] 한일 어업협정 파기 문제로 국민들간의 반일(反日) 감정이 짙어졌다. 일본 관료들의 [[망언]]이나 독도 문제가 불거졌을 때, 운동권이나 호국 보훈단체들은 일본 상품들이나 수상 허수아비를 불태우곤 했다. 이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후보가 일본 문화개방을 언급했고, 대통령 당선 이후 실제로 일본문화 개방에 박차를 가했다. [[1998년]] 4월에 문화관광부는 '대통령에 대한 업무보고'에서 일본 대중문화 개방을 공식 확인하고, 5월 13일 '한일문화교류 정책자문위원회'를 설치하여 공식적으로 일본문화 개방을 위한 준비작업에 착수했다. [[김대중 정부]] 발족 이후 [[한일관계]]는 전혀 다른 면모를 선보였는데, [[일본 정부]]와 [[궁내청]]에서는 [[1998년]] [[10월 7일]], [[김대중]] [[대한민국 대통령]]의 일본 국빈방문시 천황과 김대중 대통령과의 만찬에서 처음으로 [[아키히토]] 덴노가 [[한반도]]에 대한 '[[고통]]'과 '[[사과]]' 라는 단어를 공식석상에서 처음으로 언급함으로써 과거 일본의 모습과 다른 면모를 보였다. ([[http://news.kbs.co.kr/news/view.do?ncd=3792384|KBS]], [[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8/2005187_19498.html|MBC]]) 그리고 김대중 정부의 1998년도 방일 이후 정상화된 [[한일관계]]와 함께 일본 정부로부터 30억 달러 차관 도입도 구체화시키면서, 마침내 양국 합의하에 일본 대중문화가 1차 개방이 되면서 만화와 4대 국제 영화제 수상 영화를 시작으로 국내에서 일본문화를 공식적으로 접할 수 있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